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는 복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는 하지만, 마치 우리가 고기의 부위를 고르듯이, 우리는 복음에서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는 부분만 찾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사도바울이 보면 '당신은 복음을 모르는 구만.'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복음의 유일함> 갈라디아서 강해 1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서신을 쓰면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정성껏 자세히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과 멀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3차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서를 적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6절에 나오는 '다른 복음'은 사도바울이 전한 것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7절과 9절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복음'을 변질시켜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복음'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인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다른 복음'과 '바른 복음'에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 미상)까지 읽고,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심지어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하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갈라디아서를 가장 으뜸으로 뽑았습니다.
'다른 복음'과 '바른 복음'
갈라디아서 1장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7절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또한 복음에는 어떤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권위를 인정하기 싫은 유대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세운 공로를 저격하기 위해서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된 교리들을 가르쳤습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먼저 선택받은 유대교인이 되고, 그 증표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전통과 역사를 무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민족우월성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사건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조건은 십자가의 사건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유대교인들은 믿음에다가 행위를 더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행위를 더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에베소서 2장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우리도 자꾸 행위로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행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갈라디아서 1장 3절에 보면 은혜와 평강이 나옵니다. 은혜는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평강은 관계적 평화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평화롭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4절에 보면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건지시려고'라는 뜻은 '도려내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과 '도려내어야' 합니다. 이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대속물'은 '랜섬'이라는 뜻입니다. '맞바꾼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우리가 있던 자리 (죽음의 자리)로 예수님께서 가시고,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던 곳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 의로운 자의 자리)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같이 있던 십자가형을 받은 악질 범죄자도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렇게 나쁜 사람도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의 사건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왜 오늘날 교회는 주일 성소, 헌금,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행위가 먼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지켜야 할 것 (행위)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 날마다 기억되면, 그 기쁨으로 인해 세상적인 즐거움과 기쁨은 자연스럽게 놓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알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할례'의 원래 의미는 '할례'의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는 표징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구분되는 삶을 살지는 않으면서 '할례'만 행하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